에리히 회프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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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리히 회프너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독일 시기를 거치며 군 경력을 쌓은 독일의 군인이다. 1941년 제4기갑군 사령관으로 동부 전선에서 활동했으나,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여 불명예 제대했다. 이후 7.20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사형당했다.
에리히 회프너는 프로이센 왕국 군의관의 아들로 프랑크푸르트 (오데르)에서 태어났다. 1906년 기병 소위로 프로이센 육군에 임관했으며, 1911년에는 프로이센 참모대학에 입학하여 군사적 소양을 쌓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서부 전선에 배속되어 중대장과 여러 군단 및 군의 참모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1918년 전쟁이 끝날 때 기병 대위 계급이었다.
회프너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도 국방군에 계속 복무했다. 나치 독일 시대에 들어 그는 빠르게 성장하는 독일 기갑부대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여, 1936년 사단장으로 진급했고 1938년에는 제1 기갑사단(나중에 제6기갑사단)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 시기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그의 참모로 일하기도 했다.
2. 초기 생애 및 제1차 세계 대전
2. 1. 초기 생애
회프너는 프랑크푸르트 (오데르)에서 프로이센 군의관 쿠르트 회프너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0년 가족과 함께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구로 이주했으며, 1895년 김나지움을 졸업했다.
1906년 기병 소위로 프로이센 육군에 임관하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제13용기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1910년에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1911년 프로이센 참모대학에 입학하여 제16군단의 참모부에 배속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서부 전선에 배속되었다. 처음에는 제16군단 부관으로 근무했으며, 1916년부터는 전선에서 중대장과 여러 군단 및 군의 참모 장교로 복무하며 기병 대위로 승진했다. 1918년 독일 춘계 공세에서는 제105 보병 사단과 함께 싸웠으며, 전쟁은 기병으로 마무리했다.
2. 2. 군 경력
회프너는 프랑크푸르트 (오데르)에서 프로이센 군의관 쿠르트 회프너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0년 가족과 함께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구로 이주했으며, 1895년 김나지움을 졸업했다. 1909년 사관후보생으로 메스에 주둔하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제13용기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1910년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1913년 10월, 베를린의 육군대학에 입학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14년부터 서부 전선에서 복무했으며, 처음에는 제16군단 부관으로 활동했다. 1916년부터는 전선에서 중대장 및 여러 군단과 군의 참모 장교로 복무했다. 1918년 독일 춘계 공세 당시에는 제105 보병 사단 소속으로 참전했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기병 대위 계급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20년, 알렌슈타인의 제2기병 연대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다. 이듬해인 1921년에는 베를린으로 전속되어 기병총감 참모부에서 근무했으며, 1923년에는 고향인 프랑크푸르트 (오데르)의 제1기병사단 참모로 임명되었다. 1927년 소령으로 진급하여 쾨니히스베르크 군관구의 주임 참모를 지냈다. 1930년에는 브라운슈바이크의 제17보병 연대에서 대대장을 역임했고, 1932년 중령으로 진급하여 포츠담의 제4기병 연대장이 되었다. 1933년에는 베를린 군관구 참모장이 되었으며, 1935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1937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부퍼탈의 제1경보병사단(나중에 제6기갑사단으로 개편) 사단장이 되었고, 이듬해인 1938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에는 기병대장으로 진급하여 베를린의 제16차량화군단 군단장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 상급대장으로 진급했으며, 1941년에는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제4기갑집단 사령관을 맡았다. 같은 해 12월, 제4기갑집단은 제4기갑군으로 승격되어 계속 지휘했다. 그러나 1942년 1월, 모스크바 공방전 중 히틀러의 현 위치 사수 명령을 어기고 전략적 판단에 따라 후퇴를 결정했다는 이유로 불명예 제대당했다. 이후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했으며, 사건 실패 후 체포되어 같은 해 8월 8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2. 3.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06년 기병 소위로 프로이센 육군에 임관하여 메스에 주둔하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제13용기병 연대에 배속되었다.[1][2] 1911년 프로이센 참모대학에 입학하여[1] 제16군단 참모부에 배치되었다.[1]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서부 전선에 투입되어 제16군단 부관으로 복무를 시작했다.[2] 이후 중대장 및 여러 군단과 군의 참모 장교로 활동했으며,[1] 1916년부터는 직접 전선에서 싸웠다.[2] 전쟁 중 기병 대위로 승진했고,[2] 1918년 독일 춘계 공세에서는 제105 보병 사단 소속으로 참전했다.[1] 회프너는 기병 장교로서 전쟁을 마쳤다.[1]
3.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독일
1938년 초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으로 국방군이 히틀러에게 종속되자, 회프너는 히틀러 정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었다. 같은 해 수데텐란트 위기가 고조되자 그는 히틀러 암살과 친위대 전복을 목표로 한 오스터 음모에 가담하여 베를린 점령 임무를 맡을 예정이었으나,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와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의 유화 정책에 따른 뮌헨 협정 체결로 음모는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그의 경쟁자로 여겨지던 하인츠 구데리안이 제19군단 사령관이 되자, 회프너는 제16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당시 군단을 지휘했으며, 다음 달 기병대장으로 진급했다.
3. 1.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회프너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도 국방군에 남았다. 1920년에는 알렌슈타인의 제2기병 연대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으며, 이듬해인 1921년에는 베를린으로 전속되어 기병총감 참모부 대위로 일했다. 1923년에는 고향인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의 제1기병사단 참모로 임명되었다. 1927년 소령으로 승진하여 쾨니히스베르크 군관구의 주임 참모를 지냈고, 1930년에는 브라운슈바이크의 제17보병 연대에서 대대장을 역임했다. 1932년 중령으로 승진하여 포츠담의 제4기병 연대장이 되었다.
3. 2. 나치 독일 시기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국방군에 남았던 회프너는 1933년 베를린 군관구 참모장이 되었고, 1935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1936년 사단장으로 진급했으며, 1937년 소장 진급과 함께 부퍼탈의 제1경보병사단 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38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확장 중인 독일 기갑전력의 핵심을 이루는 초창기 기갑 부대 중 하나인 제1 기갑사단(나중에 제6기갑사단)의 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그의 사단 참모로 복무하기도 했다.
1938년 초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을 계기로 국방군이 히틀러에게 종속되었고, 같은 해 수데텐란트 위기가 고조되자 회프너는 오스터 음모에 가담했다. 이 음모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할 경우 그를 암살하고 나치 SS를 전복시키려는 계획이었다. 회프너는 제1 경보병 사단을 이끌고 베를린으로 진격하여 시내의 SS 병력을 제압하고 주요 거점을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와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의 유화 정책으로 뮌헨 협정이 체결되면서 히틀러의 전쟁 계획이 연기되었고, 음모는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그의 경쟁자로 여겨지던 하인츠 구데리안이 제19군단 사령관이 되자, 회프너는 제16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39년 3월, 회프너는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당시 제16군단을 지휘했으며, 다음 달인 4월에는 기병대장으로 진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시점에도 제16군단장 직을 유지했다. 1940년에는 상급대장으로 진급했고, 1941년에는 동부 전선에서 제4기갑집단(12월부터 제4기갑군으로 개칭) 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1942년 1월, 모스크바 공방전 중 히틀러의 현 위치 사수 명령을 어기고 예하 부대의 전멸을 막기 위해 전술적 후퇴를 감행했다는 이유로 불명예 제대당했다.
이후 회프너는 반나치 저항 운동에 계속 관여했으며, 1944년 7월 20일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등이 주도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참여했다.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후 체포되어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4년 8월 8일 베를린 플뢰첸제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4.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회프너는 폴란드 침공에서 제10군 예하 제16 자동차화 군단을 이끌고 참전하여 빠른 진격 속도를 보여주었으며, 이 공로로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훈했다. 이듬해 프랑스 공방전에서도 선봉에서 활약하여 1940년 7월 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 프랑스 침공 중 SS 토텐코프 사단과의 협력 과정에서 SS의 전쟁 범죄 의혹과 관련하여 갈등을 겪기도 했다.
1941년 독소 전쟁이 발발하자, 회프너는 북부 집단군 소속 제4 기갑 집단 사령관으로서 레닌그라드 공략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는 히틀러가 제시한 파멸 전쟁( Vernichtungskrieg|파멸 전쟁de ) 개념에 동조하여, 예하 부대에 "적을 무자비하고 완전하게 절멸"하라는 지침을 내리는 등[1] 전쟁의 이념적 성격을 적극 수용했다. 그의 부대는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발트 3국을 거쳐 진격하며 붉은 군대에 큰 피해를 주었으나, 레닌그라드 점령에는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 장교 명령을 이행하고 학살 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과 협력하는 등 전쟁 범죄에 연루되었다.
이후 제4 기갑 집단은 중부 집단군으로 전속되어 모스크바 전투에 참여했다. 회프너는 뱌즈마-브랸스크 전투에서 소련군 포위에 기여했으나, 이후 귄터 폰 클루게와의 작전상 이견 및 보급 문제, 라스푸티차와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 등으로 모스크바 진격은 좌절되었다. 그는 구데리안, 호트, 폰 클라이스트, 롬멜과 함께 뛰어난 기갑 부대 지휘관으로 평가받았다.
1942년 1월,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에 맞서 히틀러의 현 위치 사수 명령을 어기고 전술적 후퇴를 단행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어 불명예 제대 처분을 받았다. 그는 법적 소송을 통해 연금 지급 권리는 회복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히틀러에 대한 반감을 품고 저항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1944년 7월 20일,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등이 주도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참여하여 쿠데타 성공 시 국내 예비군 사령관직을 맡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고, 회프너는 사건 당일 밤 벤들러블록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인민법정에서 열린 본보기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4년 8월 8일 플뢰첸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가족들 역시 연좌제에 따라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전후 독일에서 히틀러에 저항한 인물로 재평가되어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거리나 시설물 등이 생겨났다.
4. 1.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침공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회프너는 제10군 소속으로 제16 자동차화 군단(2개의 장갑 사단과 2개의 장갑척탄병 사단으로 구성)을 지휘했다. 그의 군단은 단 일주일 만에 바르샤바까지 230km를 진격하는 기동력을 보여주었다. 이 공로로 그는 1939년 10월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훈했다.이듬해 프랑스 공방전에서는 제16군단을 이끌고 제6군으로 전속되어 리에주, 덩케르크, 디종을 공격하는 선봉에 섰다. 이 전역에서의 활약으로 그는 상급 대장으로 승진했다.
프랑스 침공 중이던 1940년 5월 22일, SS 토텐코프 사단이 제16군단에 배속되면서 회프너와 SS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덩케르크 전투 중 SS 병사들이 포로를 학대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5월 24일 회프너는 예하 부대에 포로 학대 행위를 하는 병사는 즉시 군법회의에 회부하라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3일 후인 5월 27일, SS 토텐코프 사단 소속 병사들이 르 파라디 학살에서 약 100명의 영국군 포로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학살 소식을 접한 회프너는 즉시 조사를 명령하고, SS 부대 지휘관인 테오도어 아이케에게 SS 병력에 의한 영국군 포로 학대 또는 살해 증거가 발견될 경우 해임을 요구했다. 아이케는 하인리히 힘러에게 영국군이 국제법상 금지된 할로우 탄을 사용했다고 변명했으며, 결국 아이케와 토텐코프 사단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사건은 은폐되었다. 이 사건 이후 회프너는 아이케에 대한 개인적, 직업적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으며, 사상자에 대한 무관심을 이유로 그를 "도살자"라고 불렀다. 또한 무장 친위대(Waffen-SS)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계속 유지했다.
4. 2. 독소 전쟁
프랑스 전투 후 1940년 7월 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계획이 시작되면서, 회프너는 빌헬름 폰 리프 휘하 북부 집단군 소속으로 레닌그라드를 목표로 하는 제4 기갑 집단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1941년 3월 30일, 히틀러는 고위 국방군 장교들에게 소련과의 전쟁이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닌 이념적 파멸 전쟁( Vernichtungskriegde )임을 밝혔다. 히틀러는 이념적 적에 대한 무자비한 절멸을 요구했고, 회프너를 포함한 많은 국방군 지도자들은 이러한 관점을 공유했다. 회프너는 자신의 제4 기갑 집단에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렸다.> 러시아와의 전쟁은 독일 민족의 생존 투쟁에서 중요한 장이다. 이는 게르만 민족과 슬라브 민족의 오래된 싸움이며, 유럽 문화를 모스크바-아시아 홍수로부터 방어하고, 유대-볼셰비즘을 격퇴하는 것이다. 이 전투의 목표는 현재의 러시아를 파괴하는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전례 없는 가혹함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모든 군사 행동은 계획 및 실행 시 적을 무자비하고 완전하게 절멸하려는 철의 의지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특히, 현재의 러시아-볼셰비키 체제의 지지자는 누구도 용서받지 못한다.[1]
이 지침은 공식적인 OKW(국방군 최고 사령부)의 바르바로사 지령(1941년 5월 13일)이나 OKH(육군 최고 사령부)의 정치 장교 명령 초안보다 앞서 회프너의 주도로 전달되었다. 역사가 위르겐 푀르스터는 이를 "히틀러의 이념적 의도를 명령으로 독립적으로 변환"한 사례로 보며, 히틀러와 군 지휘부 사이의 "일치 또는 친화력"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제4 기갑 집단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LVI 기갑군단과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의 XLI 기갑군단으로 구성되었다. 부대는 발트 3국을 거쳐 레닌그라드로 진격했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후, 제4 기갑 집단은 드비나강을 향해 진격하여 다우가프필스 교량을 확보하려 했다. 붉은 군대는 XLI 기갑군단에 반격을 가했고, 이는 라세이니아 전투로 이어졌다.
이후 두 군단은 루가 인근 소련군 포위를 시도했으나, 만슈타인 군단이 7월 15일 솔치에서 소비에트 제11군의 반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루가에서의 독일군 진격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4 기갑 집단은 소련 북서부 전선을 격파하여 9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1,000대 이상의 전차와 1,000대의 항공기를 파괴했으며, 스탈린 선 북동쪽으로 진격했다.
회프너는 지휘 중 "적의 무자비하고 완전한 파괴"를 요구했다.[2] 1941년 7월 6일자 명령에서는 "충성스러운 주민"을 공정히 대하라고 하면서도, "개별적인 사보타주 행위는 단순히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에게 책임을 돌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회프너의 기갑 집단은 다른 독일 부대들처럼 정치 장교 명령을 이행하여 포로가 된 붉은 군대 정치 장교들을 즉결 처형했다. 7월 2일부터 8일 사이에 제4 기갑 집단은 101명의 붉은 군대 정치 위원을 사살했으며, 처형의 대부분은 XLI 기갑군단에서 나왔다. 7월 19일까지 172명의 정치 위원 처형이 보고되었다.

7월 중순까지 제4 기갑 집단은 루가 교두보를 점령했고 레닌그라드 진격 계획을 세웠다. 학살 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 A''는 회프너 부대의 지원 하에 루가 지역으로 이동했다. ''아인자츠그루펜 A''의 지휘관 프란츠 발터 슈탈레커는 군대가 "제4 기갑 집단과의 합의에 의해, 그리고 그들의 명시적인 희망에 따라" ''아인자츠그루펜 A''의 이동을 지원했다고 언급했다. 슈탈레커는 군의 협력을 "일반적으로 매우 훌륭하다"고 묘사했으며, 특히 회프너와의 협력은 "극도로 긴밀했으며, 심지어 따뜻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보고했다.
7월 말까지, 북부 집단군은 나르바 남동쪽에 제4 기갑 집단을 배치하여 레닌그라드 공세를 재개하려 했으나, 병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8월 8일 진격을 시작했지만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다른 지역에서는 소련의 반격이 리프의 남쪽 측면을 위협했다. 8월 중순에서 8월 말까지, 독일군은 다시 성과를 거두어 제4 기갑 집단이 8월 17일에 나르바를 점령했다.
9월 5일, 히틀러는 태풍 작전(모스크바 공략 작전) 준비를 위해 9월 15일부터 제4 기갑 집단과 항공 군단을 중부 집단군으로 이전하라고 명령했다. 리프는 이에 반대했고, 이동 부대의 이전에 유예를 받아 레닌그라드를 향한 마지막 공격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제4 기갑 집단이 주요 공격 부대가 되어 네바강 남쪽에 도달했지만 강력한 소련 반격에 직면했다. 9월 24일까지 북부 집단군은 진격을 멈추고 제4 기갑 집단을 중부 집단군으로 이전했다.

태풍 작전의 일환으로 제4 기갑 집단은 귄터 폰 클루게의 지휘 하에 제4군에 배속되었다. 10월 초 제4 기갑 집단은 뱌즈마 포위전을 완료했다. 클루게는 회프너에게 진격을 잠시 멈추라고 지시했는데, 이는 소련군의 돌파를 막기 위해 그의 부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회프너는 포위망 정리와 모스크바 진격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고, 클루게의 행동을 간섭으로 간주하여 그의 상관과의 마찰을 겪었다. 회프너는 당시 그의 부대가 연료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11 기갑 사단은 연료 부족을 보고했고, 제20 기갑 사단만이 악화된 도로 상황 속에서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뱌즈마 포위망이 제거되자 다른 부대들은 10월 14일에 진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폭우와 ''라스푸티차''(진흙탕)의 시작은 궤도 차량과 자동차 수송에 잦은 피해를 입혀 진격을 더욱 방해했다. 11월 초까지 회프너의 부대는 이전 전투와 날씨로 인해 소모되었지만, 그는 다른 기갑 집단 사령관 및 중부 집단군 사령관인 페도르 폰 보크와 함께 공세를 재개하기를 갈망했다. 회프너는 집에 보낸 편지에서 단 2주간의 얼어붙은 땅이 그의 병사들이 모스크바를 포위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언급했지만, 소련군의 저항이 거세지고 그의 부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았다. 역사가 데이비드 슈타헬은 회프너가 그 기간 동안 "확고한 결의와 종종 과도한 자신감"을 보였다고 썼다.
11월 17일 제4 기갑 집단은 제4군의 V 군단과 함께 육군 집단 중앙의 태풍 작전의 연장선으로 모스크바를 향해 다시 공격했다. 기갑 집단과 군단은 클루게의 최정예 부대를 대표하며, 지속적인 공세를 펼칠 준비가 가장 잘 되어 있었다. 2주간의 전투에서 회프너의 부대는 60km (하루 4km) 전진했다. 포위전을 수행할 힘과 기동성이 부족하여, 집단은 정면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는 점점 더 큰 피해를 입혔다. 탱크 부족, 부족한 자동차 수송, 불안정한 보급 상황과 함께 끈질긴 붉은 군대의 저항과 소련 전투기가 확보한 제공권이 공격을 방해했다.
북쪽의 제3 기갑 집단은 하루 평균 6km로 약간 더 나은 진전을 보였다. 모스크바 남쪽 125km에 위치한 툴라와 카시라에 대한 제2 기갑 집단의 공격은 찰나적이고 불안정한 성공만을 거두었고, 구데리안은 전선의 상황에 따라 절망과 낙관 사이를 오갔다. 독일 최고 사령부의 압박을 받은 클루게는 마침내 12월 1일에 약한 남쪽 측면을 공격에 투입했다. 전투 후, 회프너와 구데리안은 독일이 모스크바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를 제4군의 남쪽 측면의 느린 투입으로 돌렸다. 슈타헬은 이러한 평가는 클루게의 남은 부대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것이라고 썼다. 또한 모스크바가 독일군이 포위할 만큼 충분한 병력을 갖추지 못한 대도시라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11월 25일까지 외부 방어 벨트가 완성되면서 모스크바는 국방군이 정면 공격을 감행할 힘이 없는 요새가 되었다.
12월 2일 늦게까지 회프너는 병사들에게 "목표[모스크바 포위]는 여전히 달성될 수 있다"고 독려했다. 다음 날, 그는 클루게에게 공격을 중단하지 않으면 그의 부대가 "백색으로 출혈"하여 방어 능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4군의 남쪽 측면이 이미 붉은 군대의 압박으로 후퇴해야 했고 방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클루게는 공감했다. 회프너는 12월 6일에 공격을 재개하라는 목표로 공격을 잠시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회프너는 집에 보낸 편지에서 클루게를 모스크바 점령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나 혼자 모스크바에서 30킬로미터까지 갔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버려지고 사임해야 하는 것은 매우 쓰라린 일이다"라고 적었다. 슈타헬의 견해로는 "심지어 시작하기도 전에 실질적인 의미가 거의 없었던" 작전을 지휘하는 독일 지휘관들 사이에서 회프너의 그러한 "근시안적인 사고"는 흔했다. 1941년 12월 5일, 다음 날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회프너는 5개 군단의 참모장 회의를 소집했다. 보고는 암울했다. 공격이 가능한 사단은 4개에 불과했고, 이 중 3개는 제한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공격은 취소되었고, 붉은 군대는 같은 날 겨울 반격 작전을 시작했다. 제4 기갑 집단은 같은 해 12월에 제4 기갑군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1942년 1월, 소련군의 동계 반격에 대해 히틀러의 사수 명령을 무시하고 전술적 후퇴를 했기 때문에 해임되어 독일 국방군에서 불명예 제대했다. 상급 대장으로서의 급여와 연금 지급도 중지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를 불복하여 라이프치히 지방 법원에 제소하여 승소했고, 연금만은 지급되게 되었다.
4. 3.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1942년 1월, 소련군의 동계 반격에 맞서 히틀러의 현 위치 사수 명령을 어기고 전술적 후퇴를 감행했다는 이유로 독일 국방군에서 불명예 제대 처분을 받았다. 히틀러는 그의 연금 지급을 중지시키고 군복과 훈장 착용 권리까지 박탈했다. 회프너는 이에 불복하여 라이프치히 지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승소하여 연금만은 지급받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회프너는 히틀러에 대한 저항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1944년 7월 20일,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등이 주도한 히틀러 암살 계획이 실행되었다. 당일 오후, 회프너는 베를린의 벤들러가 (현재 슈타우펜베르크가)에 위치한 국내 예비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부사령관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대장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히틀러 암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후 3시경, 쿠데타 계획인 '발키리 작전'이 발동되었다. 쿠데타에 반대한 국내 예비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프롬 상급대장은 감금되었다.
오후 5시경, 회프너는 쿠데타 세력에 의해 새로운 국내 예비군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히틀러로부터 군복 착용 금지 명령을 받았음에도, 그는 미리 준비해 온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각 군 부대에 하달된 명령서에는 회프너의 이름이 사령관으로 명시되었으나, 실제 부대 장악에는 실패했다. 히틀러는 하인리히 힘러 친위대장을 새로운 국내 예비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회프너의 명령에 따르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는 등 반격에 나섰고, 결국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오후 10시 30분경, 히틀러 지지파 장교들과의 총격전 끝에 쿠데타 세력은 벤들러블록 사령부에서 체포되었다. 프롬 상급대장은 즉결 군사 재판을 열어 올브리히트, 슈타우펜베르크 등 4명을 즉결 총살형에 처했다. 회프너는 재판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겠다며 그 자리에서의 처형이나 자결을 거부하고 체포되었다.

체포 후 회프너는 게슈타포에게 고문을 당했다. 1944년 8월 7일, 그는 에르빈 폰 비츨레벤 원수 등 다른 7명의 공모자들과 함께 인민법정(Volksgerichtshof)의 본보기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장 롤란트 프라이슬러는 회프너를 비롯한 피고인들에게 "돼지", "사냥개" 같은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으며 재판을 진행했다. 재판 과정에서 회프너는 몸에 맞지 않는 낡은 옷을 입고 틀니 착용도 금지당하는 등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재판 영상 기록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다음 날인 8월 8일, 사형 판결이 내려졌고, 불과 몇 시간 후 플뢰첸제 감옥에서 피아노선으로 목을 매는 잔혹한 방식의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처형 장면은 히틀러에게 보고하기 위해 영상으로 촬영되었다.
나치 정권의 연좌제(친족 연대 책임) 원칙에 따라 회프너의 아내, 딸, 아들(당시 육군 소령), 형제, 자매 등 가족들도 체포되었다. 여성 가족들은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특히 아내와 딸은 악명 높은 '처벌 구역'(Strafblock)에 4주간 감금되는 고초를 겪었다.[3] 회프너의 아들은 처음에는 퀴스트린(현 코스트신 나트 오드롱)의 특별 수용소에 갇혔다가 이후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히틀러에 저항한 군인으로서 회프너는 전후 독일에서 재평가받아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병영, 학교, 거리 등이 생겨났다.
5. 유산
1942년 1월, 회프너는 과도하게 확장된 병력을 철수시키기 위해 당시 중앙집단군 사령관 클루게에게 허가를 요청했다. 클루게는 이 문제를 히틀러와 상의하겠다고 답하며 회프너에게 준비를 명령했다. 히틀러의 허가가 곧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던 회프너는 1942년 1월 8일 부대에 철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반응을 두려워한 클루게는 즉시 회프너를 고발했고, 이에 히틀러는 격노했다. 회프너는 같은 날 국방군에서 해임되었다.[1] 히틀러는 회프너의 연금을 박탈하고, 법과 국방군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군복 착용과 훈장 패용 권리까지 빼앗도록 지시했다.[2] 회프너는 연금을 되찾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당시 판사들은 히틀러조차 함부로 해임할 수 없었기에 회프너는 재판에서 승소했다.[3]
회프너는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인 7.20 사건에 가담했다. 쿠데타가 실패하자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그는 자살을 거부하고 재판을 요구했다. 인민법정에서 열린 약식 재판에서 회프너는 심한 언어폭력을 당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에르빈 폰 비츨레벤 등 다른 피고인들처럼 회프너 역시 재판 중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틀니 착용을 금지당하는 등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재판관 롤란트 프라이슬러는 회프너를 심하게 질책했지만, 그의 공격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욕적인 처우에는 반대 의사를 표하기도 했다.[4] 회프너는 1944년 8월 8일 베를린의 플뢰첸제 감옥에서 고기 갈고리에 밧줄로 매달려 처형되었다.
나치 정권의 ''Sippenhaft''(친족 연대 책임) 원칙에 따라 회프너의 아내, 딸, 아들(육군 소령), 형제, 자매가 체포되었다. 여성들은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의 여동생은 곧 풀려났지만, 아내와 딸은 악명 높은 ''Strafblock''(처벌 구역)에 4주 동안 수감되어 추가적인 고초를 겪었다.[3] 회프너의 아들은 처음에는 퀴스트린(현재 코스트신 나트 오드롱)에 특별히 마련된 수용소에 갇혔다가 이후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56년, 베를린의 한 학교는 회프너가 7.20 사건에 가담하여 나치 정권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이유로 그의 이름을 따서 학교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이 이름은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고 반복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이 학교는 2008년 투표를 통해 회프너의 이름을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2009년 학교장은 "그 이름은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고, 반복적으로 논쟁이 있었다"고 밝혔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셀도르프 등 일부 지역에는 여전히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남아 있으며, 베를린 분데스하우스에는 다른 저항 인사들과 함께 그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www.deutsche-digitale-bibliothek.de
https://www.deutsche[...]
[2]
웹사이트
Dubious Role Models: Study Reveals Many German Schools Still Named After Nazis
http://www.spiegel.d[...]
2009-02-04
[3]
서적
Ravensbruck: Life and Death in Hitler's Concentration Camp for Women
https://books.google[...]
[4]
웹사이트
Nazi era lives on in German schools
https://www.thenatio[...]
2009-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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